Starry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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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남자/임경선]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의 남자

moomin95 2017. 2. 15. 21:05

나의 남자 / 임경선 장편소설


#monologue

살면서 연애소설을 본게 언제였을까, 원체 소설을 보지 않는 나는 당연히 연애소설도 보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만큼 사람의 깊은 내면을 보여주는게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정이 있음에도 한 남자에 마음이 가는 모습에 거부감이 느껴지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거부감을 느끼는 일이라도 모든 일에는 숨은 이야기들이 있다. 소설 속에 담긴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그녀(지운)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부분을 찾을 수 있다. 사람마다 다른 가정의 모습이 있지만, 그녀에게는 가정은 어떤 형태였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남편은 아내에게 선택을 위임하지만, 이와 동시에 책임도 함께 위임하는 남편의 모습은 무관심이자 무접촉이었다. 그녀에게 가정은 결핍의 장소였다. 그리고 결핍은 반복되고 채우려는 과정에서 지치는 그녀는 결핍의 익숙함에 무덤덤해져야 했다. 그러한 순간의 순간이 반복될 때 만난 장소와 자신이 온전히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그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결핍된 생활을 나와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사랑이었다. 이 사랑의 종착역에는 무엇이 있을지 나는 감히 예상하지 못한다. 또한, 그녀의 사랑이 감히 이기적인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랑이란 그 어떤 형태로도 이기적인 모양새를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이것은 내 마음을 뒤흔들었던 갈증과 번민, 인생에 비춘 작고 소중한 빛에 대한 이야기다.

스스로가 무서워질 정도로 누군가를 좋아하고,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머리의 말을 듣기를 거부하고, 몸이 일으키는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일은, 인간의 짧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리 자주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p.8

어렸을 때부터 비의 소리와 촉감을 좋아했다. 비 내리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그리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늘 무언가 좋은 일이 생겼다.


p.15

남자는 군살이 하나도 붙지 않은 몸에 헐렁한 연회색 티셔츠와 갈색 카디건, 적당히 바랜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소박하고 심플한 차림새였지만 그의 옷차림에는 연중 질서와 귀티가 배어났다.


p.20

막 결혼했을 때는 십 년 뒤의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동화책이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에서 끝나듯이 그다음에 연결되는 이야기는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너무나 먼, 상상을 초월한 시간이었다.


p.21

선물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쉽게 단순화해버린다.


p.23

결혼 생활이란 다음 날 가족이 먹을 신선한 아침 국을 매일 끓이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결혼 십 주년의 의미는, 지난 십 년간 내 결혼 생활에서 실질적으로 쌓인 것은, 내가 끓어낸 십년 치 국물들이었다.


p.34

나는 그곳에 다 와가면, 자연스럽게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나'로 변할 수 있었다.


p.43

그는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나지막이, 그것을 알고 있음을 신중하게 표현하는 그가 사려 깊어 보였다. 내 마음 속에 작은 꽃이 하나 활짝 피었다.


p.46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마치 남편이 아내가 남긴 음식을 처리하는 것처럼 깨끗이 먹어치웠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처음 느껴보는 형태의 기쁨으로 연하게 물들어갔다.


p.64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나의 존재를 확인할 뿐이었다. 더불어 그의 눈빛에는 그 존재에 대한 찬사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마치 에릭 클랩튼 <원더풀 투나잇>의 "당신 오늘 근사해 보여요. 당신은 오늘 밤 아름다워"라는 가사처럼.


p.69

그는 내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그 앞에서 나는 무릎에 힘이 빠지듯 한없이 약해졌다. 그런 내가 결코 싫지 않았다. 내가 약해질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행복하기도 했다.


p.73

큰일 났다 싶으면서도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해버릴 때가 있다.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후회마저도 달콜할 것이다.


p.80

애써 말을 덧붙여보았지만 스스로가 더 구차하게 느껴졌다. 말을 뱉어놓고 후회하고의 연속. 사람이 이토록 갈수록 우스워질 수도 있단 말인가.


p.86

병과 약이 똑같이 한 사람에게서 나오다 보니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고,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 어쩔 수 없음조차 나는 사랑했다.


p.89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하며 길을 걷다가 혼자 넋이 나간 사람처럼 싱글벙글 웃기도 했다. 길을 걷다가도 그와 닮은 느낌의 남자가 있으면 한 번 더 뒤돌아보게 되었다.


이 관계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적어도 나는 그를 물리적으로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그의 얼굴을 보려고 기다릴 필요도 없고 약속을 따로 잡을 필요도 없었다. 그 사람이 보고 싶으면 내가 그에게로 가면 됐다. 내가 움직이면 되었다. 가면 반드시 그를 볼 수가 있었다. 갈증은 내가 나서서 채울 수 있었다.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안도되는지 몰랐다.


p.96

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처음 듣는 그의 질투 어린 말에 당혹스러운 행복감을 느꼈다.


p.111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내가 선택한 것들의 결과였다. 자신이 쳐놓은 인생의 덫은 책임감으로 감당해야 했다.

윤재를 내 생명보다도 사랑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p.117

아내는 관대해야만 한다. 특히 십 년이나 결혼생활을 한 아내라는 사람은.


p.133

그날 밤 나는 내가 결혼한 여자라는 사실, 내가 어떤 남자에게 법적으로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통렬하게 재확인했다.


나에겐

서운해할 권리도,

불평할 권리도,

상처 받을 권리도

없었다.

그것은 어둡고 깊은 진실이었다.


p.145

나의 결핍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배우자가 둔감하다는 것이고, 설사 그 결핍을 솔직하게 말한다고 해도 이해조차 못해준다면 더욱 절망적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p.148

인간은 기본적으로 제멋대로지만 그래도 그 이기적인 행동에 책임을 지려 하기 때문에 인간다워질 수 있는 것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불안함과 찜찜함이 마음을 좀먹더라도 그 비밀을 무덤에 갖고 갈 때까지 '혼자' 짊어지고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어차피 어떻게 하면 좋을지는 상담자 본인이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p.150

한편으로는, 나중에 후회해도 좋으니까 그 순간만이라도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 감정이 내 안에서 요동치자 나는 비로소 '사랑에 빠져 있던 그들'을 처음으로 마음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행위는 지극히 이기적인 것이었다.

어쩌면 아뭇것도 알지 못한 사람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은, 그들이 아닌 나였을지도 모른다.


p.159

내가 화가 난 대상은 남편 이상으로 나 자신이었다. 하지만 지금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옆에 있는 이 남자밖에 없었다.


p.164

다만 사랑에 빠지는 순간보다 이별의 아픔을 느끼는 순간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보다 더 강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고 늘 생각해왔다. 그래서 남편과 맺어진 경험을 했으니 그와의 이별을 경험해보고 싶기도 했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남편이 죽으면 그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많이 기꺼이 슬퍼하리라는 것은.


p.170

자기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성현이 좋았다. 고요하고 견고하게 취향과 품위를 간직한 성현이 좋았다. 다른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기 인생을 천천히 살아가는, 그리고 제법 그것을 즐길 줄 아는 성현이 좋았다.


p.177

차가움은 어느새 녹아내리고 나의 심장에서 다시 열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세상의 많은 것들은 붙잡으려 하면 멀어지고 이젠 끝났다 싶으면 다시 다가왔다.


p.181

You'd think that people would have had enough of silly love songs.

넌 사람들의 한심한 사랑 타령은 충분히 들었다고 생각하겠지.

But I look around me and I see it isn't so.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아.

Some people wanna fill the world with silly love songs.

한심한 사랑 타령으로 세상을 채우고 싶은 이도 있지.

And what's wrong with that?

그래서 그게 뭐가 잘못됐지?

I'd like to know, cause here I go again.

나도 뭐가 잘못된 건지 알고 싶어. 그래서 나는 이렇게 또 워쳐보지.

I love you, I love you.

당신을 사랑해, 당신을 사랑해.

I love you, I love you.

당신을 사랑해, 당신을 사랑해.


Paul McCartney&Wings <Silly Love Songs> 에서


p.183

나는 아내나 엄마로서의 시간보다 한 사람의 여자인 시간에 온몸의 세포가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여자일 때 비로소 소설을 쓸 수 있었다.


p.193

시간이 한참 지나 질투는 겨우 애틋함으로 바뀌어, 내가 이 사람을 얼마나 이기적으로 좋아하는지를 체감하면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p.202

당신도 지금의 나처럼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당신도 지금의 나처럼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으면 좋겠어.

그 사람을 나보다 더 좋아하게 되었다 해도 나는 이해 할 수 있어.


p.210

그러니까 나는 더더욱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은 적어도 정직하고 진지하게 나를 직면하고 있었다.

"글을 쓰셔서 더 잘 아시겠지만 사람의 마음은 늘 바뀝니다. 이젠 힘든 게 솔직히 싫습니다."


p.228

추위가 기억을 방해했지만 어떻게든 그를 기억하고 싶었다.

(중략)

그날 이후로 어떤 예감만으로도 가슴이 울렁이던 것을 기억했다. 잠을 설치고 잠자리에서 뒤척이던 밤들을 기억했다. 슬픔과 기쁨이 같은 이유를 가지고 있던 날들을 기억했고, 그를 절실하게 안고 싶었던 밤들을 기억했고, 그를 절실하게 안고 싶었던 밤들을 기억했고, 하루빨리 그 사람을 잊어야 한다고 재촉하던 나를 기억했다.

사랑한 것과 사랑받은 것, 그 모두가 어느 날에는 추억이 될 것이다. 후회는 없었다.

참 좋은 사람.

당신을 더 빨리 알았더라면.


p.235

공항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나는 다시금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지갑을 호주머니에 집어넣다가 남편과 아들의 사진이 삐죽 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남자는 누구이고 이 소년은 누구였더라.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꽤 먼 곳까지 와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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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소설은 이 세상에 넘치도록 많고 작가는 자신이 바라보는 사랑을 이야기에 투사하기 마련이다. 나에게 있어 사랑은 빠져버리는 것이고, 서툰 것이고, 그 사람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것이고, 할 수 있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는 것이고, 마침내는 이기적으로 욕심을 내는 것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타인의 사랑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 그것은 이를테면 서로간의 약속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