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ry night
[7년의밤/정유정]세령호는 서원의 우물이 될 터였다. 제 아빠의 것보다 더 어둡고, 깊고, 힘센 우물. 본문
[7년의밤/정유정]
#잡담
정유정 작가의 책을 읽을 때마다 멈출 수 없는 흡입력을 느끼고는 한다. 그 흡입력은 독자들을 작품 속의 심연에 끌려 들어가게 만든다.
읽는 내내 멈출 수 없이 책장을 넘기게 된다. 그와 동시에 심연 속에 끌려가는 음울한 느낌은 넘기던 책장을 망설이게 만든다.
이 책은 실수로 인해 한 아이를 죽이게 된 남자와 그 아이의 아버지 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 남자의 아들이 7년 전의 세령호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7년간의 악몽에서 벗어나게 되는 이야기로 진행된다.
이번에 영화화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를 어떻게 영화로 풀어낼지 기대된다.
영화 <7년의 밤> 크랭크업 현장
#문장
p.25
"사실이 전부는 아니야."
"그러니까 사실이 거짓말일 수도 있다는 거지요?"
침묵이 가장 정확한 답변을 할 때가 있다. 그떄 우리 사이에 흐르던 침묵이 바로 그랬다. 나는 흉벽 안에서 울리는 진실의 목소리를 들었다.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p.28
나는 카메라플래시를 받으며 서 있었던 열두 살 이래로 허둥댄 적이 없다. 소년분류심사원에 다녀온 후부턴 분노하지도 않는다. 누군가 호감을 표해와도 관계에 대한 기대를 품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상활에서도 당황하지 않는다. 안다. 놀라면 허둥대야 정상이다. 모욕당하면 분노하는 게 건강한 반응이다. 호감을 받으면 돌려주는 게 인간적 도리다. 내 또래 아이들은 대부분 그렇게 산다. 아저씨는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 문장에서 '그렇게'를 떼어내라고 대꾸한다.
나도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당황하고, 분노하고, 수치심을 느끼고, 누군가에게 곁을 내줘서는 안 된다. 거지처럼 문간에 서서, 몇 시간씩 기다려서라도 일한 대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을 사는 나의 힘이다. 아니, 자살하지 않는 비결이다.
p.27
우리는 떠돌이가 됐고 주거지는 대개 항구도시였다. 아저씨는 내게 본격적으로 다이빙을 가르쳤다. 바다는 내게 자유를 주었다. 해저의 어둠 속에 가만히 몸을 옹크리면 세상이 한숨에 사라졌다. 그곳은 누구의 손도 닿지 않고, 누구의 눈길도 미치지 않고, 누구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세상의 절대벽이었다.
p.28
세상에는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따돌림과 고의적 시비를 무시하는 일, 몰매를 맞으면서도 대항하지 않는 일. 침묵 속을 걷는 일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교실을 나오는 동안 내 몸은 새파란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차갑고도 끈질긴 불길이었다.
p.41
나는 올가미를 잡아 그 목에 걸었다. 입을 열어 명령을 내렸다.
"집행"
철컥, 하는 소음과 함께 마루판이 꺼졌다. 남자는 지상에서 사라졌다. 나는 솜이불을 젖히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고개를 돌려 창문을 내다봤다. 어둑한 하늘에 진홍색 저녁 해가 걸려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마루판 밑으로 사라진 남자가 아버지였다는 걸.
p.131
선생은 '자유의지'라는 단어를 칠판에 적더니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미래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자는 자기 삶을 지킬 수 있다."
p.179
"시신과 눈을 마주치고 나면 도망갈 데가 없어요. 꼼짝없이 붙들려서 화상을 입는다고요. 먼 곳을 보고 계세요. 호수 건너편이나 하늘......"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 해가 사라지고 남쪽 하늘에서 납빛 구름과 축축한 바람이 올라오고 있었다. 현수가 서 있는 곳은 호숫가가 아니었다. 수수벌판 속 오래된 우물 앞에 어머니와 나란히 서 있었다. 우물 안에서 아무 기척도 없었다.
p.180
"아빠."
그는 숨을 멈췄다. 세상이 멈추었다. 소리도, 움직임도, 사람들도, 그 무서운 정지의 순간에 그의 왼손만 물고기처럼 펄떡거렸다. 기억이, 잊으려 안간힘을 썼던 기억이, 그를 향해 기차처럼 질주해오고 있었다. 그는 멈칫멈칫, 뒷걸음칠 쳤다. 정신없이 눈을 깜박거렸다. 눈알이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다시는 고의로 잊지 않도록, 무의식이 잠시라도 진실을 누락시킬 수 없도록, 아이의 눈이 그의 눈에 화인을 찍고 있었다. 당신은 사고를 낸 게 아니야. 살인을 저지른 것이지.
p.200
서원은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예뻤어요, 꼭 살아 있는 것처럼."
가로등이 서원의 얼굴을 비췄다. 뺨이 발그레했다.
p.408
누군가 남편에게 자신의 삶을 걸고 지켜야 할 '어떤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어떤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걸 버릴 수 있느냐고 물어도 마찬가지 답을 할 것이다. 최종적으로, '어떤 사람'을 버리는 것이 지키는 길이라면, '어떤 사람'을 버릴 수 있겠는가, 라고 물어도 이 역시 '예스'라는 답을 듣게 될 것이다. 서원을 그녀에게 데려가라고 한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서원을 버리는 것 말고는 지킬 길이 없다는 의미.
p.417
흑마술같은 부름이었다. 목덜미를 꿰는 소리였다. 이건 실제가 아니야, 하면서도 그는 우물로 끌려갔다. 밧줄 한 가닥이 우물 안으로 걸쳐져 있었다. 안쪽은 깊고 어두웠으나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밧줄에 매달린 건 서원이었다. 길쭉하고 가느다란 몸이 처마에 매달린 풍경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꺼져가는 목소리가 우물 벽을 때렸다.
p.434
홀로 삶을 꾸려야 할 때, 고양이는 세 가지 방법을 조합하여 살아간다고 한다. 사냥, 쓰레기통 뒤지기, 친절한 사람들의 호의에 기대기. 어니는 세 번째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녀석이었다.
p.446
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이었다. 정상적으로 보여야 할 반응이 없었다. 울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최소한 흐느끼기라도 해야 했다. 뒤늦은 쇼크가 온 것처럼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침묵했다. 승환은 갑갑했다. 어떤 식으로든 터트려야 했다. 그러지 못한다면, 서원은 홀로 견딘 공포와 고통을 영원히 끌어안게 될지도 몰랐다. 세령호는 서원의 우물이 될 터였다. 제 아빠의 것보다 더 어둡고, 깊고, 힘센 우물.
p.466
이후 세령호에 가본 적이 없었다. 갈 기회도 없고, 갈 마음도 없고, 갈수도 없었다. 저지대마을 사람들은 대피할 시간도 없이 잠든 새에 일을 당했다. 지소에서 출동하던 형사들까지 모두 죽었다. 나는 그 엄청난 일을 저지른 남자의 아들이었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잊을 틈 없이 대가를 치르며 살아왔으므로. 그렇게라도 살 수 있었던 건, 나 역시 미쳐버린 남자의 희생양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아저씨의 소설은 이 비루한 삶의 명분마저 앗아갔다. 꼼짝없이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내 삶이 그 많은 목숨과 바꾼 것이라는 진실을.
p.474
그쪽에게 남편이 되어 편지를 쓰는 도안, 저는 남편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니, 인간에 대해 좀 더 솔직한 이해에 도달하게 됐다고 해야겠지요. 어디선가 그런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총을 가지면 누군가를 쏘게 되어 있으며, 그것이 바로 인강의 천성이라고. 더하여 제 등짝에 붙어 있는 존재와 정면으로 맞닥뜨린 시간이기도 합니다. 딸에 대한 죄책감과 언젠가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남편에 대한 두려움으로 평생 방 안에 숨어 살아갈 제 그림자 말입니다.
p.501
블루 오브 증후군(Blue Orb Syndrome)이라는 게 있어. 바다에서 일어나는 광장공포증이지. 깊고, 넓은 해저에 나 홀로 있다는 인식이 엄습하면, 공포에 사로잡힌 나머지 의식이 핀 포인트가 되는 거야. 감압은 말할 것도 없고 숨을 뱉는 일까지 잊어버려. 그 일이 내게 남긴 게 그거다. 뭔가를 쓰려고 노트북을 켜면 내 앞에는 워드화면 대신 블루 오브가 열리는 거다. 길을 찾으려 들면 들수록 넓어지고 깊어지며 광활해지는 공간. 나느 그 어둡고 푸른 우주에서 미아가 되곤 했어. 대필을 시작한 건 그 때문이야. 누군가 던져주는 얘깃거리를 정리하면 되는 일이니까.
p.505
"이전 게임을 복기해서 패인을 찾아내는 사람, 게임의 판을 읽고 흐름을 조율하는 사람, 타석에 들어선 타자를 분석하고, 행동을 예측하고, 승부할 시기와 수를 판단하는 사람, 온몸으로 홈 플레이트를 사수하는 사람, 그게 포수지. 그리고 난 열두 살 떄부터 포수로 길러진 사람이고. 야구를 그만두면서 그 본능을 잊고 살았네. 내 인생에서 승부를 걸 일은 더 이상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p.506
"7년 전 밤이 계속되고 있는 거야. 오영제는 사형이 집행되는 날, 서원이와 나를 동시에 손에 넣을 생각인 거야. 그전에 훼방꾼부터 손보겠지. 훼방꾼이 누군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거야. 자네와 서원이를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게 만든 건 그때를 위한 포석이야. 떠돌아다니게 만들어야 없어져도 찾을 사람이 없을 테니까. 내가 짐작한 건 거기까지네. 이 안에서 판을 다 읽는 건 무리야. 상상이 불가능한 부분들이 많아."
p.511
아저씨의 얘기가 끝났다. 나는 입을 다물고 의자에 쳐박혔다. 가슴에서 분노가 탔다. 대상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고, 끌 방법도 없는 불길이었다. 사형집행 통보서를 받았을 때, 나를 바다로 내몬 바로 그 분노였다.
p.512
저 젋은 눈동자는 그때 무엇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을까.
누가 그것을 알까. 이 젋은 눈동자가 바라보는 '무엇'이 교수대는 아니었으리란 점만 분명했다.
p.513
"오영제만 처리하면 다 끝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죠?"
"아니야. 단지 네가 자발적으로 그 일을 하기를 바란 것이지."
"왜요?"
"팀장님은 네 안에 도사리고 있는 걸 두려워했어. 그것이......"
아저씨는 한동안 앞만 바라보았다.
"너 자신을 죽일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고, 나아가 너를 괴물로 만들 수도 있으니까."
"제 안에 있는 걸 누가 만들었는데요. 그 과정을 고스란히 밟은 사람이 누군데요. 아버지예요. 자신을 죽이고, 누군가를 죽이고, 스스로 괴물이 된 사람은 바로 아버지라고요."
"그래서였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서늘한 기운이 가슴을 쓸고 갔다. 아저씨가 말했다.
"그래서......넌 아니기를 바란 거야."
p.521
작가의 말
사실과 진실 사이에는 바로 이 '그러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야기되지 않은, 혹은 이야기할 수 없는 '어떤 세계'. 불편하고 혼란스럽지만 우리가 한사코 들려다봐야 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모두 '그러나'를 피해 갈 수 없는 존재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겠다.
이 소설은 '그러나'에 관한 이야기다. 한순간의 실수로 인해 파멸의 질주를 멈출 수 없었던 한 사내이 이야기이자, 누구에게나 있는 자기만의 지옥에 관한 이야기며, 물러선 곳 없는 벼랑 끝에서 자신의 생을 걸어 지켜낸 '무엇'에 관한 이야기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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