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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기억법/김영하]"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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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기억법/김영하]"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moomin95 2017. 9. 29. 10:41

[살인자의기억법/김영하]


#문장

p.28

죽음은 두렵지 않다. 망각도 막을 수 없다. 모든 것을 잊어버린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닐 것이다. 지금의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내세가 있다 한들 그게 어떻게 나일 수 있으랴. 그러므로 상관하지 않는다. 요즘 내가 마음에 두는 것은 딱 하나뿐이다. 은희가 살해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내 모든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이 생의 업, 그리고 연.


p.43

"독을 뿜는 게로구나."

"제아무리 미물이라도 다 살아남는 수가 있지요."


p.63

"우연히요. 정말 우연히요."

은희가 말했다.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쓰는 '우연히'라는 말을 믿지 않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p.93

과거기억을 상실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게 되고 미래 기억을 못하면 나는 영원히 현재에만 머무르게 된다. 과거와 미래가 없다면 현재는 무슨 의미일까. 하지만 어쩌랴. 레일이 끊기면 기차는 멈출수밖에.


p.105

수치심과 죄책감: 수치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것이다. 죄책감은 기준이 타인에게, 자기 바깥에 있다. 남부끄럽다는 것. 죄책감은 있으나 수치는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타인의 처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는 수치는 느끼지만 죄책감은 없다. 타인의 시선이나 단죄는 원래부터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부끄러움은 심했다. 단지 그것 때문에 죽이게 된 사람도 있다-나 같은 인간이 더 위험하지.


p.129

오이디푸스는 무지에게 망각으로, 망각에 파멸로 진행했다. 나는 정확히 그 반대다. 파멸에서 망각으로, 망각에서 무지로, 순수한 무지의 상태로 이행할 것이다.


p.140

"당신은 이해를 못 해. 누구보다 그 장면을 기억하고 싶은 게 바로 나라는 것을. 형사 양반, 나도 기억을 하고 싶다고. 왜냐하면 나한테는 너무 소중한 것이니까."


p.145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p.157

'살인자의 기억법'은 세계가 무너져내리는 공포 체험에 대한 기록이다. 그것은 그저 알츠하이머의 증상을 과장하는 것이 아니다. 김영하는 이것을 반야심경의 악목으로 형상화 한다.


(중략)


"그러무로 공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리나."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그리고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물질과 느낌과 생각은 기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으켜세워진 허상이기 쉽다. 그러므로 그 허상들에 집착하며 고통을 받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무명)인가. 


p.163

자신을 제외한 어떤 대상에도 마음쓰지 않는 것, 모든 대상들을 자기 마음대로 제어하고 부정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연쇄살인범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p.172

처음에는 꽤나 답답했는데 생각해보니 그게 바로 주인공의 페이스였다.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 아닌가. 그래서 마음을 편하게 먹고 천천히 받아적기로 했다. 그렇게 한 문장 한 문장 써나가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내 소설이다. 내가 써야 한다. 나밖에 쓸 수 없다.


# 잡담


누구나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 있고. 그리 생각하고 싶어하는 허상들이 있다. 기억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져서 자신의 과거는 허상으로 채워지고, 미래는 잘못된 기억에 의해 만들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 사람자체에게는 그 허상과 거짓자체가 그 사람의 세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제대로된 세계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자신은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런 고로 그 사람의 세계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면서 계속 들던 기시감이 있었다. 그런데 그 기시감은 마지막에 은희는 이미 죽었고, 노인이 추구하고 목표하던 모든 미래가 허상임을 알게 될 때 그 기시감이 풀렸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듯 띵해졌다. 내가 생각하고 기록한대로 내 자신이 믿는 것들이 생기고, 왜곡된 진실로 자신의 목표가 생긴다면 그리고 내 생의 업으로 정한 것이 애초에 없는 것이라면 이는 어찌 할 수도 없는 문제인거 같다..

기억을 잃는 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